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안티고노스 왕조 (문단 편집) === [[제2차 마케도니아 전쟁]] === 필리포스 5세가 팽창주의 움직임을 전혀 포기할 기미를 보이지 않자, 로도스와 페르가몬이 로마에 원조 요청을 하는 바람에 로마가 제 2차 마케도니아 전쟁'을 일으킬 빌미를 주고 말았다. 제 2차 마케도니아 전쟁은 1차와는 달리 로마가 총력전을 펼칠 수 있었기 때문에 필리포스 5세의 군대는 기원전 198년 [[아오이 스테나 전투]]와 [[키노스케팔라이 전투]]에서 패배했다. 이때 마케도니아군이 항복의 표시로 창을 들어올렸는데, 로마군이 이 표시를 알아보지 못하고 마케도니아군을 그대로 도륙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필리포스 5세는 시간을 질질 끌며 내심 셀레우코스 제국의 개입을 기다리고 있었으나 안티오코스 3세는 이미 이집트와 새로운 전쟁을 벌여 필리포스 5세를 도와 줄 형편이 아니었다. 이에 실망한 필리포스 5세는 로마의 보호국이 되는 조약을 승인하고 말았다. 그의 패배 직후, 로마군은 소아시아에 상륙하여 기원전 189년 [[마그네시아 전투]]에서 안티오코스 3세를 상대로 대승을 거두었다. 이 때 안티오코스 3세는 필리포스 5세에게 다시 동맹을 맺어 로마에 대항하자고 제의했으나, 필리포스 5세는 이제 와서 굳이 지중해의 패자가 된 로마를 적으로 돌려서 좋을 것이 없다고 판단하여 제안을 거절했다. 그러나 아직 마케도니아의 독립이 위태로워진 것은 아니었다. 필리포스 5세는 자신의 팽창주의 정책이 좌절된 것을 알고 나서부터는 국가의 내정에 전보다 훨씬 주력했으며, 이로 인해 마케도니아는 다시 번영을 되찾게 되었다. 영토도 크게 줄고, 그리스 도시국가에 대한 통제권도 잃어버렸지만, 필리포스 5세는 이 손실을 트라키아와 발칸 반도의 내륙 쪽으로의 확장으로 만회할 생각이었다. 서서히 부활해가는 마케도니아는 신흥 강대국인 로마와 저물어가는 대제국인 셀레우코스 사이에서 중간자의 역할을 하면서 부를 쌓았다. 셀레우코스 제국과는 기원전 198년과 기원전 190년의 원조 거절로 대변되는 외교적 트러블이 몇 번 있기는 했지만 대체적으로 동맹에 준하는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이런 외교적 움직임을 로마는 껄끄럽게 여겼으나, 필리포스 5세는 로마를 싫어하였기에 그대로 일을 추진하였다. 주변국과 벌인 분쟁에서 로마가 노골적으로 마케도니아에게 불리한 조약을 이끌었기 때문이다. 로마인들은 그가 [[키노스케팔라이 전투]]에서 로마군의 좌익을 두들겨 부쉈던 것을 끝내 잊지 못하고 있었다. 만일, 그때 한 무명의 호민관이 재치를 부리지 않았다면, 키노스케팔라이 전투는 필리포스 5세의 승리로 돌아갔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로마인들의 의혹 속에서도 그는 굴하지 않고 마케도니아 부흥을 위해 힘썼다. 그런 일의 일환으로 호전적인 게르만계 부족인 바스타르나이족을 이용하여 다르다넬스 해협 건너에 영토를 마련할 생각으로 그 준비에 착수했나, 기원전 179년에 병사하는 바람에 이를 실현하지 못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